[한국사건] 우순경 사건
1982년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일대에서 우범곤 순경에 의해 발생한 총기난사 및 대량살인 사건이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된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경찰로 채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민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고 있을 때 경찰들은 온천에서 접대를 받고 있었다. 경찰의 근무 태만이 만연하여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또한 해당 경찰서장도 접대로 이탈했다. 무기고 열쇠를 잃어버리는 등 관리가 허술해 사망자 수를 늘렸다. 경찰들이 범인을 잡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사건 현장에서 오히려 멀리 도망가 숨어 있었으며 사건 후 뒷수습까지 엉망진창이었다. 한때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될 정도로 엄청난 사건임에도 백서 하나 편찬하지 않았다. 사상자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1981년 12월 30일 오후 5시 궁류지서로 전근 온 뒤, 이듬해 2월 8일에 하숙을 하던 우범곤은 이웃집에 살던 전양과 사귀게 되었다. 3월 9일에 전양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양의 가족들은 우범곤의 술버릇을 이유로 동거를 반대했다. 우범곤은 술만 마시면 폭력적이었고, 이로 인해 미친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우범곤이 궁류지서로 전근 온 것도 사고를 쳐서 좌천된 것이다. 원래 101경비단 소속으로 청와대 경호를 맡았으나 거친 성격으로 인해 근무 부적격 판정을 받아 청와대 경호에서 제외되었고, 궁류지서로 전출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했지만, 우범곤은 열등감을 느끼며 심각한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
1982년 4월 26일, 그날 우범곤은 저녁시간 근무를 위해 12시경 집으로 들어와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잠든 와중에 동거녀가 그의 몸에 붙은 파리를 잡기 위해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쳤고, 둘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화를 미처 식히지 못한 채 우범곤은 오후 4시경 지서로 갔고, 오후 7시 30분경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만취한 상태에서 동거녀를 폭행했으며, 동거녀의 친척 언니를 포함한 마을 주민들이 이 사건을 듣고 우범곤을 만류하려 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나갔다.
지서로 향한 우범곤은 술에 취해 카빈총을 장전했고, 방위병들을 쫓아낸 뒤 예비군 무기고에서 M2 카빈 2자루, 실탄 144발, 수류탄 7개 등을 탈취했다. 그 후의 범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26일 21:40: 대구에서 표구사를 하는 남자에게 발포 후, 궁류면 토곡리 재래시장에서 주민 3명 살해
21:45: 궁류우체국에서 교환원 2명과 집배원 1명을 살해
22:00: 압곡리 매실부락에서 주민 4명과 인근 마을 주민 2명을 살해
22:10: 운계리 시장에서 주민 7명을 살해, 수류탄 투척
22:50: 평촌리 상갓집에서 12명 살해
4월 27일 05:35: 평촌리 마을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5명을 폭사시키고, 자살로 사건이 종료되었다.
우범곤의 범행은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악질적인 행위로 악명 높았다. 또한 사건 중 한 택시 기사는 집집마다 위험을 알렸으나, 결국 우범곤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우범곤의 범행 중 경찰은 대응은커녕 사건을 방관했다. 경찰서장과 경찰들은 사건 발생 당시 무기고로 향해 각자 무기를 챙기고 출동했으나 우범곤의 반대 방향으로 출동하는 엉뚱한 행동을 벌였다. 결국, 경찰들은 사건 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범인을 잡는 대신 도망갔다.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은 사건 발생 다음 날까지도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고, 경찰들은 경찰서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며, 경찰들은 한 발도 쏘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62명이 사망하고 33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 6명은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사망했다. 20세 이하의 희생자는 16명이었으며, 그 중 10세 이하의 어린이와 갓난아기도 포함되었다. 우체국에서 피살된 교환원의 부인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의 피해는 지역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경찰의 근무 태만과 무기 관리 부족으로 사건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경찰서의 무기고 관리가 허술하여 우범곤이 화기를 탈취할 수 있었고, 범행 당시 우범곤이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의심하지 않고 그를 맞이했다. 또한, 경찰의 안일한 인사정책과 경무과의 무능함도 큰 원인이었다. 우범곤은 경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으며, 경찰의 부주의로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졌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전두환 정권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찰 관계자들을 처벌했다. 경찰서장과 관련자들은 파면되었으며, 의령군 주민들에게 대대적인 보상이 이루어졌다. 사건 후에는 경찰의 치안 체계와 무기 관리 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빠르게 대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