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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건] 부천 LPG 충전소 가스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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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11일 금요일 오후 2시경,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내동사거리 인근의 한 LPG 충전소에서 증기운 폭발(VCE)이 발생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인해 총 1명이 사망하고, 96명이 부상당한 대형 참사이다. 1차 폭발 충전소 안전관리자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탱크로리 운전자가 밴트 밸브를 열고 이충전 작업을 하던 중 로리호스 커플링이 이탈하며 가스가 누출되었다. 그 시점에 택시가 시동을 걸며 생긴 스파크가 가스에 점화되어 1차 폭발이 발생하였다. 2차 폭발 첫 폭발 이후 소방당국과 관계기관이 출동하였고, 대형 화재 진압이 진행되는 중 2시 23분경 탱크로리가 폭발하면서 지름 50m 이상의 불기둥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주변 공장과 차량들이 화염에 휩싸였고, 약 60여 명이 추가로 부상하였다. 이 장면은 KBS 항공1호기가 생생히 촬영하여 세계적 특종이 되었다. 3차 폭발 오후 2시 24분경, 지하 매몰형 부탄 저장탱크가 폭발하며 3차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규모는 컸지만 주변 건물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이후 인근 소형 LPG 용기들도 잇달아 폭발하였다. 사고 결과 총 1명이 사망하고, 11명이 중상, 85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차량 18대가 완파되었다. 재산 피해는 약 12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 사고를 계기로 가스 관련 법과 안전 기준이 강화되었다. 특이사항 사고 당시 KBS 헬기 항공1호기가 우연히 폭발 장면을 생생하게 촬영하였고, 이는 뉴스로 보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방송사인 MBC는 자존심 문제로 해당 영상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인 캠코더 화면을 활용하였다. KBS는 이후 해당 영상을 자사 헬기팀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대표 사례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사건]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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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사고 개요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는 1997년 8월 6일,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한 보잉 747-3B5 항공기가 괌 앤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에 착륙 도중 추락하여 254명 중 229명이 사망한 참사이다. 이 사고기는 대한항공 소속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SUD(Special Upper Deck) 구조를 가진 B747-300 기종이었다. 사고 경위 평소 이 노선에는 에어버스 A300-600R이 투입되었으나, 여름 성수기로 인해 임시로 대형 기종인 보잉 747-3B5가 투입되었다. 비행기는 괌 시간으로 오후 1시 42분에 도착 예정이었고, 착륙 30여 분 전 괌 지역에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관제소는 활공각 지시기(Glide Slope)가 고장나 사용이 불가하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착륙을 준비하던 중 조종석에서는 잘못된 활공각 신호가 수신되었고, 조종사들은 이를 진짜 신호로 오인해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고도 확인 절차가 생략되었고, 항공기는 규정보다 빠르게 고도를 낮추게 되었다. 기장은 착륙이 가능하다고 판단해 하강을 계속했고, 대지접근경보(GPWS)가 울려도 무시하였다. 결국 기수가 들린 채 송유관을 치고 니미츠 힐에 추락하면서 기체에 불이 붙고 대형 화재가 발생하였다. 사고 원인 분석 사고의 종합적 원인은 기장의 피로, 글라이드 슬롭의 오작동, 잘못된 지시 신호, 조종사들 간의 혼선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특히, 니미츠 VOR/DME 지점이 활주로와 거리가 떨어져 있었음에도 조종사들은 이를 착륙 지점으로 오해했으며, 이는 사고의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되었다. 다만 비행 전 브리핑에서 조종사들은 해당 정보를 알고 있었음이 녹취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사고 이후 변화 사고 이후 대한항공은 KE801 편명을 KE805로 변경하였다. 괌 국제공항의 신호 시스템도 FAA 규격에 맞게 개편되었다. 이전까지 괌 공항은 MSAW(최저고도경보기)가 공항 중심이 아닌 외곽 해역을 중심으로 작동했으나, 사...

[세계사건] 아이린모어 등대지기 실종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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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의 플래넌 제도(Flannan Isles) 아이린모어(Eilean Mòr) 섬에서 등대지기 3명이 실종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메리 셀러스트호 실종과 함께 바다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미스터리로 꼽힌다. 1. 사건 개요 스코틀랜드 북부의 아이린모어 섬은 해상 사고가 잦은 북해에서 선박의 안전을 위해 등대가 설치된 곳이다. 이 등대는 예정보다 2년 늦은 1899년 12월에 완공되었으며, 토마스 마셜, 제임스 다켓, 도날드 맥아더 세 명의 등대지기가 근무하고 있었다. 1900년 12월 15일, 등대 불빛이 꺼져 있는 것을 발견한 배들이 이를 신고하였다. 그러나 폭풍우로 인해 열흘 뒤인 12월 26일이 되어서야 조사대가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섬에는 아무도 없었고 등대는 정돈되어 있었으며, 등대의 일지는 12월 15일까지 기록된 상태였다. 2. 실종 원인에 대한 추정 등대 주변 조사 결과, 섬의 서쪽 상륙지역이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고, 철제 구조물과 바위가 밀려 들어온 흔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날씨는 평온했으며, 등대에는 세 벌 중 두 벌의 방수복만 사라져 있었다. 등대지기 3명 중 1명은 반드시 등대에 남아야 한다는 규정을 고려하면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유령, 바다 괴물, 외국 스파이 등의 괴기스러운 가설들이 제기되었으나 증거는 없었다. 가장 유력한 원인은 '이안류'와 같은 갑작스러운 파도였다. 섬의 지형상 동굴과 협곡이 많아 폭풍이 없더라도 거센 파도가 들이칠 수 있는 구조였고, 그로 인해 3명이 휩쓸려 실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3. 사건 이후 이 사건은 닥터 후의 에피소드, 오페라 <등대>, 영화 <키퍼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뤄졌다. 이후에도 등대는 운영되었으나 1971년 자동화되면서 무인 등대가 되었다.

[한국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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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고이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인근 삼풍아파트, 서울고등법원, 우면로 등으로 건물의 파편과 잔해, 먼지가 날아들어 주변을 지나던 행인 중에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 사고로 수많은 재산상 손해와 인명 손실이 발생했고, 사고 직후 119구조대, 경찰,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군, 정부, 국회까지 나서 범국민적인 구호 및 사후처리가 이어졌다.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 실종자는 6명이었으며, 피해액은 약 2,700여억원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중 최명석, 유지환, 박승현은 각각 11일, 13일, 17일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주상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와 한울빌딩이 2001년 착공되어 2004년에 완공되었다. 붕괴 원인 부지 용도 삼풍백화점의 부지 용도는 붕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건설 과정에서 비리가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1989년, 삼풍 아파트가 완공된 후, 삼풍 건설은 그 앞에 남은 넓은 땅에 상가나 다른 건물을 짓고자 공사를 시작했으나, 무허가 공사로 제재를 받았다. 이유는 그 땅이 백화점을 지을 수 없는 아파트용 부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풍 그룹은 서초구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불법적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내부 구조 임의 변경 1987년 설계 당시 삼풍 백화점은 '삼풍 랜드'라는 명칭으로 서초동 삼풍 아파트 대단지의 종합 상가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건물이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 삼풍건설산업의 회장 이준은 백화점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건물의 구조가 상당히 바뀌었고, 구조 변경을 우려한 우성 건설은 이를 거부했지만, 이준 회장은 계약을 파기하고 구조 변경을 강행했다. 법률상 건물의 사용 용도에 따른 구조 변경은 반드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했지만, 백화점 설계 당시 이를 무시하고 ...

[한국사건] 3연속 건널목 사망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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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대한민국 철도 연쇄 사고: "새마을호 162" 2002년 5월 1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일련의 철도 사고는 역대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발생한 사고는 단 한 대의 열차에서 3명의 사망자가 나온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고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비극적 사례로 남게 되었다. 사고 발생 사고 열차는 구 새마을호 #162호로, 전라선 여수역에서 10시 20분에 출발하여 서울역에 15시 51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고는 30분도 되지 않아 첫 번째 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사고: 율촌역 인근 여흥건널목 10시 46분, 여수역 출발 26분 후, 전라선 율촌역 인근의 여흥건널목에서 첫 번째 사고가 발생했다. 81세의 할머니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당시에는 평범한 건널목 사고로 보였으나, 이 사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두 번째 사고: 삼례역 구내 익옥천철교 사고 여파로 기관사를 교체하고 운행을 재개한 후, 1시 4분, 전라선 삼례역 구내 익옥천철교에서 또 다른 사고가 발생했다. 82세의 할머니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이 사고로 일부 승객들은 공포에 질려 중도 하차한 뒤 환불을 요구하기도 했다. 세 번째 사고: 함열역 인근 용성건널목 두 번째 사고가 발생한 지 불과 35분 후인 1시 39분, 호남선 함열역 부근의 용성건널목에서 세 번째 사고가 발생했다. 90세의 할아버지가 열차에 치여 사망했다. 이제 이 사고 열차는 3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 안에 3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것이다. 사고의 원인과 철도청의 조사 철도청은 사고 조사 후, 해당 기관사들 모두 특별한 잘못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고의 원인은 전적으로 사망자들의 과실이었다. 사고가 발생한 건널목은 경보 장치와 신호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무단으로 건널목을 건넌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세 번째 사고의 피해자는 건널목 관리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무단으로 건널목을 넘다가 사망했다. 여파와 후속 조치...

[한국사건] 숭례문 방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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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발생한 사건으로,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이다. 방화범은 당시 69세의 채종기(경북 칠곡 출신)로 밝혀져 구속되었고,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에 발생했다. 채종기는 시너를 부은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고, 그 불은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였다.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불은 빠르게 번져 2층 누각이 붕괴되었고, 이후 1층으로 번져 1시 54분경에는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화재 진압 중 숭례문에 걸려있던 현판도 소방관들에 의해 떼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이 과정에서 현판이 손상되었다. 현판은 무거운 중량을 받쳐내지 못하고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금이 가고 일부 파편이 유실되었다. 처음에는 전기시설의 누전 등으로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고 1층의 전기시설도 정상 상태였던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후 숭례문 주변에서 목격된 50대 남성의 모습이 방화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화재는 방화로 추정되었다. 경찰은 현장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를 발견했으며, 수사를 진행한 결과 방화범으로 채종기를 지목했다. 채종기는 2006년 창경궁 방화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그 당시에도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그는 숭례문 방화에 대해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며 범행을 인정했다. 이후 경찰은 그의 집에서 시너 1병, 사다리, 의류 등 증거를 발견하고 그를 체포하였다. 숭례문 화재로 인해 발생한 피해는 엄청났고, 복원에는 수년이 걸렸다. 복원 작업은 2~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주요 부분들이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재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숭례문의 실측 도면이 2006년에 작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원...

[세계사건]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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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 사고는 1986년 1월 28일, 미국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NASA의 우주왕복선 개발 이래 25번째 임무였던 STS-51-L 미션은 우주 통신망 확충과 원격 교육, 핼리 혜성 관측 등 다채로운 목표를 가진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발사 후 불과 73초 만에 폭발하며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로 끝났다. 사고의 배경 이 임무는 NASA가 추진한 '우주 교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민간인 교사 크리스타 매콜리프가 우주에서 과학 실험을 통해 원격 수업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1985년부터 준비된 이 프로젝트는 12,000여 명의 교사 지원자 중 매콜리프를 선발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동시에, 핼리 혜성 관측이라는 천문학적 기회를 잡기 위해 NASA는 일정에 큰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발사 일정은 여러 차례 지연되었다. 초기 계획은 1월 22일이었으나, 이전 임무의 지연, 기상 문제, 발사 준비 과정의 기술적 문제로 인해 발사는 1월 28일로 미뤄졌다. 발사 당일, 기온은 평년보다 크게 낮은 영하 1.1℃였으며, 이로 인해 사고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 로켓 부스터의 O-Ring이 탄성을 잃는 문제가 발생했다. 사고의 전개 발사 후 약 59초, 우측 로켓 부스터의 이음매에서 불꽃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는 외부 연료탱크의 손상을 초래하며 결국 폭발로 이어졌다. 폭발은 73초 지점에서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왕복선은 공중에서 산산조각났다. 충격적으로, 승무원들은 폭발 직후에도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비상용 호흡 장치 7개 중 3개가 활성화된 채 발견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승무원들은 고속으로 바다에 추락하며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의 영향 챌린저 사고는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과 우주 탐사 계획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주왕복선 발사는 사고 이후 2년 8개월간 중단되었고, 안전성 강화와 설계 개선을 위한 전면적인 점검이 이루어졌다. 사고 조사 과정...

[한국사건]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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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1월 23일, 대한항공 포커 F27 여객기는 속초에서 김포로 향하던 중 하이재킹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이 탑승한 이 비행기는 홍천 상공에서 폭탄을 들고 있던 납치범 김상태에게 제압당했다. 사건의 전개는 끔찍했으며, 조종실의 문이 부서지며 폭탄이 터지는 등 여러 차례의 위기를 맞았지만, 탑승자들의 기지와 용기 덕분에 모두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납치 사건을 넘어서, 당시 대한민국이 겪고 있던 국가적 긴장 상황과 함께 사람들의 희생정신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기도 했다. 납치범 김상태는 폭탄을 들고 조종사들에게 비행기를 북한으로 돌리라고 요구했다. 이때,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협박에 순응하는 척하며 비행기를 북쪽으로 돌리지만, 실제로는 공군의 긴급 출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F-5 전투기가 출격하면서 이 비행기는 제압의 순간을 맞이했다. 기내에서 승무원 최천일과 수습 조종사 전명세는 기지를 발휘해 승객들에게 납치범을 속이도록 요청했다. 이를 통해 비행기는 공군의 F-5와 조우할 수 있었고, 납치범 김상태는 그 순간을 틈타 제압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폭탄이 떨어지며 점화된 순간, 수습 조종사 전명세는 자신의 몸을 던져 폭탄을 막았다. 그는 몸으로 폭탄을 덮쳐 기내 폭발을 막았고, 이는 모두의 생명을 구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비록 전명세는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지만, 그의 희생은 생존자들에게는 귀중한 생명을 안겨주었다. 만약 그가 몸으로 폭탄을 막지 않았다면, 이 사건은 더 큰 참사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건 후, 전명세 기장은 사후 기장으로 추서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과 함께 조종사 정복을 수여받았다. 그의 시신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그의 유언은 "탑승객이 다칠까봐 몸을 던졌다"는 간결한 말로 전해졌다. 이 사건은 이후 반공 교육에서 널리 활용되었고, 2024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하이재킹'이 개봉되며 ...

[한국사건] 1·21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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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사태(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김일성의 명령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북한 124부대 소속의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신조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1월 17일, 무장공비들은 휴전선을 넘어 21일 밤 9시 30분경 서울 청와대 인근까지 진입했다. 경찰의 불시검문에서 발각되어 도주하며 총격전이 벌어졌고, 군경합동 작전이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국은 향토예비군, 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684부대를 창설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청와대 경호를 강화하기 위해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에 대한 통행이 금지되었다. 북한은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인했으나, 생포된 김신조는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고 밝혀 큰 충격을 주었다. 배경으로, 1965년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북한은 이를 기회로 대남 공작을 활발히 벌였다. 북한 124부대는 1967년 4월에 창설되어 1968년 1월 17일에 청와대 기습 작전을 준비하였다. 31명의 특공대는 군복을 입고 무장 후 1월 17일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다. 하지만 경찰의 불시검문에 발각되었고, 도주 후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북한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부인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작전 실패를 이유로 여러 고위 간부들이 숙청되었다. 또한, 대남 공작은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북한은 1월 23일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기도 했다.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휘 아래,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고 예비군 및 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등을 창설했다. 또한 대통령 경호 강화를 위해 일반인의 청와대 주변 통행을 금지했다. 이 사건의 후속 조치로 중앙정보부는 684부대를 창설하여 보복 공격을...

[세계사건] 맨 힐 섬의 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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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0월,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떠밀려 온 의문의 사체는 당시 큰 관심을 모았다. 발견 당시 사체는 이미 부패가 진행 중이었고, 그 크기는 놀라울 정도로 컸다. 몸길이는 6미터에 달했으며, 무게는 2톤에 이른다. 이 사체의 외형은 마치 장경룡과 유사한 형태로 묘사되었으며, 일부 증언에서는 다리가 잘린 낙타의 모습 같다고도 전해졌다. 무엇보다도, 이 사체의 가장 특이한 점은 작은 머리와 긴 목에 두 개의 커다란 지느러미처럼 보이는 기관들이 달려 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체는 심하게 부패해 형태가 불분명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를 해석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장경룡의 사체나 고대 해양 생물의 시체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체의 부패 상태를 고려하면, 이런 해석은 과학적인 근거보다는 단순히 믿음에 의한 추측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설명은 이 사체가 심하게 부패한 돌묵상어의 시체라는 주장이다. 이 사건과 유사한 경우로는 일본에서 발견된 ‘즈이요마루’ 사건이 있다. 즈이요마루는 1950년대에 일본 근해에서 발견된 거대한 해양 생물의 시체로, 당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미스터리한 생물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역시 해석이 분분했으나, 과학적인 분석 결과는 여전히 그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세계사건] 불가리아 야당 대표 가스총 테러 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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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월 19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발생한 "불가리아 야당 대표 가스총 테러 미수 사건"은 당시 불가리아 야당이었던 권리자유운동의 의장 아흐메드 도간을 겨냥한 시도였다. 사건은 도간이 소피아에서 연설을 하던 중, 한 청년이 무대 위로 난입해 호신용 가스총을 도간의 머리에 겨누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고, 이를 기회로 도간은 기민하게 대처하며 상황을 역전시켰다. 두 사람은 그 짧은 순간에 눈빛을 교환했지만, 결국 범인은 제압되었고 회장에서 끌려나갔다. 이 장면은 유튜브에서 한동안 움짤로 유행하기도 했다. 범인 옥타이 에니메흐메도프는 당시 25세의 튀르크 출신 청년으로, 불가리아의 흑해 인근 부르가스에서 왔다. 그는 ‘나는 도간을 증오한다’라는 반야당 단체의 일원으로, 마약 소지와 절도, 폭행 등 범죄 전력이 있었다. 그가 사용한 가스총은 호신용으로, 탄약이 들어있지 않았고, 두 번의 방아쇠 당김에도 불발됐다. 전문가들은 이 총이 발사되었더라도 도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낮다고 분석했다. 에니메흐메도프는 2014년 2월,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심에서 2년간의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암살 시도가 아니라, 그 이면에 여러 의혹을 남기게 되었다. 많은 불가리아인들은 도간 전 의장이 자작극으로 이 사건을 벌였다고 믿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불가리아 정치에서 종종 동정표를 얻기 위해 정치인들이 테러나 암살 시도를 연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범인이 징역형을 받았음에도 그 처벌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점이다. 세 번째 이유는 에니메흐메도프가 과거 권리자유운동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했으며, 사건 당시 당원증을 제시해 아무런 제지 없이 회장에 입장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도간 전 의장이 사건을 꾸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사건 이후 도간 전 의장은 의장직을 사임했으나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특히, 사건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

[한국사건] 독일호텔 퇴마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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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인 일행 5명이 한국인 여성 이미라(41세)를 구타하여 호텔 객실에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동기는 개신교 퇴마 의식으로, 일행은 이미라에게 악령이 들렸다고 믿고 이를 쫓아내려 했다.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이미라와 그녀의 남편 남학규(42세), 두 아들(15세, 13세), 그리고 민지영(41세)과 그녀의 두 아들(15세, 14세), 김씨(44세)와 그의 자녀들(21세 아들, 19세 딸) 등 총 10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서부의 슐츠바흐에서 주택을 임대해 생활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영어와 독일어를 하지 못했다. 이웃들은 이들이 밤중에도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일행이 독일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이미라의 작은 아들이 귀신이 들렸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이를 믿고 일행에게 귀신을 쫓는 의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이미라의 둘째 아들이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보이자, 일행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은 나갈지어다"라고 외치며 아이의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이미라와 민지영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며, 그들에게 의식을 강요했다. 일행은 점차 김씨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김씨는 이미라와 민지영을 통제하기 위해 폭행을 정당화했다. 이미라는 김씨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고, 결국 김씨는 이미라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미라는 수시간 동안 침대에 묶여 구타당한 끝에 사망하게 되었다. 가해자들은 고통에 따른 신음이 밖으로 들리지 않게끔 수건과 옷걸이로 피해자의 입을 강제로 막았으며, 시신에서는 구타에 따른 멍이 발견되었다. 사인은 심한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전해졌다. 사건 당일, 일행은 한인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목사는 상황을 이상하게 느끼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미라의 시신과 함께 탈수와 저체온증으로 심하게 다친 민지영을 발견했다. 민지영은 퇴마 행위의 또 다른 피해자로 추정되었...

[한국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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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 성서 지역에서 5명의 초등학생들이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으로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다. 그들의 실종은 당시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며, 2002년 9월 26일, 실종된 지 11년 6개월 만에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사건의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제사건으로 손꼽히며, 범인의 윤곽도, 피해자의 신원도 밝혀지지 않아 많은 의문을 낳았다. 이 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고 전해졌으나 언론의 오보로 인해 도롱뇽이 아닌 개구리로 알려지면서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아이들은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갔지만, '개구리 소년'이라는 잘못된 명칭이 붙여지게 된 이유는 당시 도롱뇽에 대한 공포감을 줄이기 위해 개구리로 잘못 보도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 경찰의 초동 수사 실패로 인해 실종 당시부터 의문점이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실종된 와룡산은 마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곳이었고, 수많은 수색에도 불구하고 단서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 당시 아이들이 여러 사람에게 목격되었으나, 범인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1991년 5월, 당시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대규모 수색을 벌였지만, 사건의 해결은 요원했다. 5명의 아이들은 우철원(6학년), 조호연(5학년), 김영규(4학년), 박찬인(3학년), 김종식(3학년) 등으로, 모두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었다. 사건 발생 당일, 아이들은 와룡산으로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갔고, 실종된 뒤부터 부모들은 밤새도록 아이들을 찾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수많은 제보와 허위 정보에 휘말려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건이 벌어진 후, 수많은 제보가 쏟아졌고, 전국적으로 아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수색은 1996년까지 진행되었으나, 결국 아이들의...

[일본사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사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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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카마타 이와오(1936년 3월 10일 ~ )는 일본의 전직 권투 선수로, 1966년에 시즈오카현 시미즈 시에서 자신이 일하던 된장제조회사의 전무 일가족 4명을 살해하고 방화한 혐의로 기소되어 1980년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하카마타는 체포 직후 혐의를 인정했지만, 이후 첫 재판부터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에 의해 자백했다고 주장하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하카마타의 누나인 히데코는 동생의 무죄를 호소하며 1981년부터 재심 청구를 시작했으나 대법원은 27년 후인 2008년 3월 특별항고를 기각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2차 재심 청구가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당시 검찰이 범인의 옷에 묻었다고 주장한 혈액 유전자와 하카마타의 것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수사기관에 의한 증거 조작이 있음을 지적했다. 2014년 3월 27일, 하카마타의 사형과 감옥의 집행 정지 및 재심이 결정되었고, 2024년 9월 26일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일본변호사연합회가 지원하는 재심 사건으로 ‘하카마타 사건’이라고 불린다. 하카마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사형수’로 알려져 있으며, 88세인 지금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카마타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은 1966년에 발생한 일가족 4명 살해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칼에 찔려 숨진 상사 부부와 두 자녀였으며, 수사당국은 하카마타가 이들을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뒤 현금 20만엔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판단했다. 하카마타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경찰의 폭행과 강압적인 심문 끝에 자백했다. 1968년, 그는 살인 및 방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수십 년에 걸친 법적 공방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피 묻은 옷에서 시작되었다. 이 옷들은 하카마타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되었지만, 그의 변호사는 이 옷에서 채취한 DNA가 하카마타의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것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수사 당국이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며, 이를 믿은 무라야마 히로아키 판사는 ...

[일본사건] 이시이 마이 양 실종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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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7월 25일, 일본 후쿠시마현 후네히키마치에서 일어난 어린이 실종 사건은 일본 3대 미해결 어린이 실종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사건 중 하나로, 여전히 많은 미스터리를 남긴 채로 해결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날, 건축업자 이시이 켄이치의 집에는 켄이치의 부모, 그의 아내 요시코, 두 아들 켄토와 레오, 그리고 딸 마이, 켄이치의 조카와 그 조카의 남자친구인 K, 요시코의 친구의 딸 두 명이 함께 있었다. 이 날 오후, 켄이치의 부모는 노래방에 갔고, 마이와 다른 두 아이는 K의 방에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 10시 30분, 요시코는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어준 후 2층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서 요시코는 K가 집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봤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와 누군가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전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요시코는 목욕을 마친 후, 남편과 아들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새벽 2시, 켄이치의 부모가 노래방에서 돌아왔을 때, 집의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열려 있었다. 그들은 K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잠이 덜 깬 켄이치는 "내일 이야기하자"며 다시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20분경, 마이와 함께 자던 두 어린이가 깨어보니 마이가 사라져 있었고, 아이들은 이를 켄이치와 요시코에게 알렸다. 마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가족들이 알게 된 후, 경찰이 집안을 수색했으나 가족이 아닌 사람의 지문이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누군가 마이를 납치해 현관 앞에 대기시킨 후 차에 태워 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건 당시, 밤 11시경, 집 근처에 흰색 차가 있었으나, 이 차의 차주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은 마이의 어머니 요시코와 K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K는 사건 당시 밤에 집을 나갔다가 아침 6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왔고, 친구를 만나기 ...

[세계사건] 사막에 묻힌 E.T 카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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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는 1982년 영화 E.T. the Extra-Terrestrial 을 기반으로 아타리 2600용으로 개발된 게임이다. 이 게임은 영화의 인기와 상관없이 비디오 게임 역사에서 '최악의 게임'으로 손꼽히며, 아타리 쇼크의 주요 원인으로 여겨졌다. 아타리 쇼크는 이 게임이 비디오 게임 업계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으로, 당시 아타리의 대규모 재고 처리 문제와 함께 업계의 큰 위기를 일으켰다. 게임은 E.T.가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통신기 부품을 모아 외계인 우주선으로 돌아가는 어드벤처 퍼즐 형태이다. 비록 게임 자체는 제작 기간이 매우 촉박한 상황에서 완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친절하고 직관적이지 않은 게임플레이, 그리고 반복적인 요소들로 인해 사용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게임의 진짜 전설은 출시 이후 반품된 카트리지들에 관한 이야기로, 대량의 재고 게임 카트리지가 뉴멕시코 앨러모고도 사막에 묻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타리는 처음에는 이를 부인했지만, 30년이 지난 후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발굴 작업을 진행해 실제로 묻혔던 카트리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게임 역사에서 상징적인 전설로 자리잡았고, 발굴된 카트리지는 경매에 나와 일부는 1500달러에 거래되기도 했다.

[세계사건] 맥스 헤드룸 전파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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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11월 22일, 시카고의 하늘이 저물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사람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밤은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뒤흔들리게 된다. 그날, 두 차례에 걸쳐 방송국의 전파가 사라지고, 화면 속에는 신원불명의 괴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수많은 미스터리를 남긴 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첫 번째 사건은 오후 9시경, 시카고의 WGN-TV 스포츠 뉴스 방송 중에 발생했다. 앵커 댄 로언이 평소처럼 스포츠 소식을 전하고 있을 때, 갑자기 화면이 흔들리며 이상한 인물이 나타났다. 그 인물은 "맥스 헤드룸"이라 불리는 기괴한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그가 등장한 배경은 고요하고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의 말은 불분명하고 무작위적인 행동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그는 화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가 말하는 내용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어지러운 말들이었다. "헬로, 헬로! 내가 당신을 안다고 생각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화면은 다시 불명확하게 끊어졌다. 20초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소름 끼치는 장면은 종료되었고, 당시 방송국의 엔지니어들은 급히 그 장면을 차단했다. 하지만 앵커는 그저 눈을 크게 뜨며 말할 뿐이었다. "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사건은 그칠 줄 몰랐다. 바로 2시간 후, 다시 한 번 전파납치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WTTW 방송국에서 일어났고, 이번에도 '맥스 헤드룸'의 기괴한 마스크를 쓴 괴인이 화면을 점령했다. 그는 이번에도 명확하지 않은 말을 뱉어내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에는 영상과 음성 모두 정상적으로 전송되었고, 화면 속에서 그가 펼친 기괴한 행동은 더 이상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마치 현실의 끝자락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차원의 괴이한 사건처럼 보였...

[세계사건]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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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은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인증을 저지하고, 트럼프의 패배를 번복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켰다. 트럼프가 주관한 집회에서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펜실베이니아 애비뉴를 행진한 뒤 국회의사당에 난입하였다. 이들은 선거인단 개표를 방해하고,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공식화를 막으려 했다. 습격자들은 국회의사당 내부로 침입하여 일부 건물을 점령하고 파괴했다. 시위대는 경찰 경계선을 뚫고, 의회경찰대와 충돌하면서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다. 이 공격으로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급조된 폭발물이 발견되었고, 국회의사당과 인근 건물은 모두 폐쇄되었다. 시위대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을 인질로 삼으려 했고, "펜스를 교수형에 처하라"는 외침도 있었다. 트럼프는 처음에 군을 보내 시위대를 진압하는 데 반대했으며, 시위대에게 '위대한 애국자'라고 부르며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이후 그는 질서 있는 권력 이양을 약속하고, 사건은 그날 저녁에 마무리되었다. 1월 7일, 선거인단 집계가 재개되어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가 공식적으로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비난을 받았으며, 트럼프의 행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일부 공화당원은 공격을 지지하거나 트럼프를 비난하지 않았고, 연방수사국은 170건 이상의 수사를 진행 중이다. 1월 13일, 하원은 트럼프를 '반란 선동'으로 탄핵하였고,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두 번 탄핵된 대통령이 되었다. 2021년 1월 6일의 국회의사당 습격은 1814년 영국군의 침략 이후 처음으로 국회의사당이 침범된 사건이었다. AP통신은 코로나19 팬데믹과 그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등의 방역 조치가 극단주의와 폭력적인 성향의 확산을 촉진시켰다고 분석했다. 이로 인해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미국 민병대 운동 같은...

[일본사건] 악마의 시 번역자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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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일본에서 발생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의 피살 사건은, 그가 살만 루슈디의 논란이 된 작품 《악마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1991년 7월 11일, 이가라시가 쓰쿠바대학 건물 내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살해당하는 형태로 일어났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O형의 혈액과 중국제 쿵푸용 신발 자국이 발견되었지만, 범인을 특정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이란 정부는 《악마의 시》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란은 루슈디와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이란 정부의 특수요원이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와 유사한 사건이 다른 번역자들에게도 발생한 바 있다. 하지만 이가라시는 무슬림이 아니었으며 이슬람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부는 그가 《악마의 시》를 번역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 사람이 저지른 테러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반면, 사건이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범행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가라시 교수는 연구실이 아닌 엘리베이터 앞에서 살해당한 점이 의문을 자아냈고, 이는 범인이 은폐하기 쉬운 장소에서 살해하지 않고 노출된 장소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일본 정부는 이란과의 외교적 문제를 우려해 사건을 신속히 종결시키려 했고, 그로 인해 사건 수사는 마무리되지 않았다. 경찰은 범인을 찾는 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이가라시가 쓴 메모가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단노우라에서 죽는다"는 내용이 프랑스어로 "계단에서 살해당한다"로 적혀 있어,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 후 이 사건은 여러 매체에서 다루어졌고, 특히 2012년 5월 20일 방송된 신비한 TV 서프...

[일본사건] 3억 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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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2월, 일본의 한 평범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전개를 보였다. 일본 신탁은행 코쿠분지 지점장이 집으로 배달된 협박장을 받은 뒤, 단순한 장난으로 여겨졌던 일은 그날 저녁,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 협박은 "지점장의 집을 폭파하겠다"는 내용이었고, 경찰은 이를 중대하게 받아들였지만 사건은 결국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은 여전히 그 미스터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1968년 12월 10일 오전, 일본 신탁은행은 현금 수송차에 3억 엔을 실어 출발했다. 당시의 현금 수송차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특수한 차량이 아닌, 그저 평범한 세단이었다. 무엇보다, 이 수송차가 결국 일본 역사상 가장 대담한 현금 탈취 사건의 한 복판에 서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송차가 도쿄의 후추 형무소 근처에 도착했을 때, 한 경찰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타났다. 그 경찰은 현금 수송차의 기사에게 다가가 말했었다. "스가모 지점장이 집이 폭파되었고, 이 차량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 차를 조사해야 한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그 경찰이 아무리 조사해도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그 경찰은 갑자기 "폭탄이다! 피해라!"라며 고함을 질렀고, 수송차의 트렁크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경찰은 수송차를 그대로 몰고 사라졌고, 기사와 탑승자들은 그저 황급히 도망쳤다. 그 순간, 현금 수송차는 도둑에게 넘어갔고, 경찰은 범인의 흔적을 뒤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추적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수송차의 궤적을 따라가던 경찰은 몇 가지 단서를 찾았지만, 결국 그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은 이미 사라졌고, 경찰은 그 후로도 아무리 수사를 해도 그를 잡지 못했다. 그 후, 경찰은 용의자 몽타주를 만들었고, 그 몽타주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사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사건은 더욱 미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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